2006년 03월 15일
나의 해방전후
나의 해방 전후유종호 지음 / 민음사
(오기하라) 선생은 외투를 걸치더니 바래다 주겠다며 집을 나섰다. 외투 안으로 나를 끌어넣고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 앞 50미터쯤 되는 세거리에서 이제 다 왔으니 혼자 가보라고 하였는데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니 선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내가 돌아보자 손을 들어 보였다. 검정 외투 차림으로 함박눈 속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은 별볼일 없는 내 유년기 활동사진의 최고 서정시다. 이 서정시 때문에 나는 많은 것을 불문에 부칠 수 있었다. (...) 여선생이 돌아간 뒤 때마침 며칠 째 유하고 계셨던 외조모가 하필이면 왜 일본 기집애가 담임이냐고 말하는 것이어서 적지 않이 부아가 났다. 며칠 동안 속으로 외조모의 망언을 용서하지 않았다. 조선인 가네무라 선생이나 유키무라 선생보다 몇 배 낫다고 생각하면서. (유종호, 나의 해방전후 중)
"(창씨개명 당시) 출석번호 1번은 요시야마라는 성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최상남이라는 이 동급생은 자기의 창씨가 실은 자기 성인 최씨의 파자임을 자랑스러운 듯이 말해 주었다. 이렇게 본래 성씨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심한 일을 두고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는 것은 반듯한 지적은 아닐 것이다. 본래의 성씨에 대한 각별한 집착은 어디까지나 가문에의 집착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성씨와는 무관한 일본식 성으로 고쳤다고 해서 그 집안을 친일 가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창씨를 끝가지 거부했다고 해서 그 집안을 반일 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친일 행위는 친일 행위대로 부족없이 이행하고 본래의 성씨를 고수한 사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 순진한 학생이 윤동주 가문의 창씨를 알고 크게 실망하는 것은 당대 상황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원로 문학자가 기억의 복원을 위해 자신이 겪은 해방전후의 이런저런 생활상들을 소상히 적은 이 책은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읽힌다. 군데군데 적잖이 당혹스러운 부분들도 발견되지만 이 기록이 친일미화로 읽혀지지 않는 것은 지은이의 성찰적인 태도와 진정성, 표현의 품격, 당위적인 것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 담담한 서술 자세 때문이다. 얼마전에 실증사학과 민족주의 비판을 표방하며 해방전후사를 재인식해야 한다고 나선 일군의 쌍라이트 학자들에게는 결여된 것으로 느껴졌던 미덕이다.
# by | 2006/03/15 11:37 | 골드문트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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